현 서울시 마포구 공덕동에 위치한 한겨레 사옥은
1991년에 건립되었다
. 한겨레 홈페이지를 참조하면 조건영 건축가가 설계했으며
, ‘프랑스
바스티유 감옥
’에서 모티브를 얻었다고 설명한다
. 이어서
“건물 모양은 두 팔로 세상을 감싸 안는 형상이며
, 건물 오른쪽에는
삐죽한 탑은
‘펜
’을 상징합니다
. ‘좋은 글을 쓰자
’라는 한겨레의 의지를 반영한 것입니다
”라고 소개한다
. 다소 피상적인 설명의 속뜻은 엉뚱하게도 삼청동 소재
국립현대미술관
(서울관
)에서 들을 수 있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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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자료사진1 - 한겨레 공덕동 사옥의 초창기 설계도면을 그대로 재현한 모형(국립현대미술관) |
[종이와 콘크리트:한국 현대건축 운동
1987 – 1997] 3전시실에 가면 한겨레의 설계도와 모형이 제일 앞에 자리하고 있으며
건축가가 한겨레 사옥에 관해 쓴 글을 읽을 수 있다. 해당 시기의 건축인들은 앞선 이들이 수행한 국가
프로젝트와 결별을 시도하는 한편 민주화와 세계화의 거센 물결을 해쳐나가려 했다. 1990년대는 건축인들이
건축 내외부 경계를 넘나드는 지적 토대를 쌓고자 분투한 시기였으며, 한국에서 건축의 의미를 다시 묻고자
한 때였다. 그런 시대적 배경 속에서 1990년 2월 7일에 현 한겨레 신사옥 기공식이 열렸고, 이듬해 12월 14일
구성원들이 정식으로 입주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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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료사진2 - 북측 전경의 '시대의 양심 겨레의 숨결'이라 적힌 대형 현수막이 인상적이다(국립현대미술관) |
조건영 건축가는
한겨레 사옥 설계
당시 세 가지 개념을 투영했다. 첫 번째는 신문사가 공장이라는 것. 방대한
양의 정보를 모아 몇 시간 안에 신문으로 만들어내는 작업 공정은 어떠한 공산품 제조공정보다도 더 비정하리 만큼 비능률이나 머뭇거림을 용납하지 않는다.
두 번째는 신문사가 공방이라는
것. 하루하루 만들어지는 신문은 개별 기자의 분명한 개성과 뚜렷한 방향성이 있다. 한 작가의 아뜨리에가 갖는 분위기와 작품 사이의 관련 같이 신문사의 편집국 분위기와 신문 사이에는 긴밀한 연관이
존재하며, 개별 기자들의 인생관, 세계관, 신문제작에 참여하는 자세도 다르다고 믿음과 동시에, 바로 거기에서
‘한겨레적인’ 공동체 정신이 스며 있다.
세 번째는 일종의 부호라는 것. 깃발이나 구호와 같이 한겨레 신문사는 공중에
퍼져 사람의 눈과 귀를 자극시켜야만 하고, 천박하고 안일하게 체념에 빠지려는 질서를 깨뜨리는 불온한(?) 상징이어야 한다. 이러한 의미는 우리가 가졌던 여섯 개의 공화국과
앞으로 가지게 될 여러 개의 공화국에서 겪게 될 반역의 상징이다.
이상의 내용이
‘그러나 모든 진보는 반역으로부터 비롯되며
, 그것은 역사와 사회를 썩지 않게 하는 유일한 처방이요
, 바로 그
처방이 한겨레 신문의 탄생설화이니
, 나는 이 탄생설화를 부호로써 형상화시키고 싶었다
’는 조건영 선생의 글에서 발췌 및 요약한 부분이다
. 광화문 넓은 대로에
위치한 조선일보와 동아일보의 도시적이고 거대한
(매력 없는
) 사옥에
비하면 확실한 정체성을 가진 건축물이 확실하다
. 건축가의 세 번째 개념은 현재에 이르러서 여기저기 퇴색하여
벗겨진 페인트 꼴이 되긴 했지만
.
'퇴색'은 그 자체로 장기적인 변화의 결과를 말한다. ‘민족의 역사를 올바르게
펼치고 민중의 생활을 개선시키는 작업에 기여하고자 하는 지사적 자세의 표현’이 ‘한겨레적인 공동체 정신’이라던 건축가의 글귀에 빗댄다면 확실한 결과이다. 사람들은 더이상 한겨레를 우리의 ‘정신’처럼 여기지 않는다. 그보다 ‘언론적폐”라는 구호 속의 일부로 생각할 뿐이며, 어쩌면 ‘재건축’이 더 주효하다.
세간의 관심이 집중되는 듯 했으나 한겨레의 보도자제 요청으로 인한 언론 카르텔의 작동, 어느덧 아스라이 흘러간 '한겨레 기자 폭행 살인사건'을 대하는 태도는 그들이 여태 소리 높여 타도하고자 했던 이들의 그것과 닮아 있었다. 구태여 정파적으로 경도된 MBC 제3노조(공동위원장 김세의·임정환·최대현)의 성명을 구구절절 인용하지 않더라도 한겨레의 대응은 의혹 해소에 부족하다. 나아가 고인의 장례식에 참석한 한겨레 양상우 사장이 "지금 장례식장 밖에 있는 언론사와 접촉하지 마라. 한겨레가 명백히 진상규명하겟다. 부인이 원하면 한겨레로 취업 시켜주겠다"고 발언했다는 보도를 우리는 대체 어떻게 받아들여야 한단 말인가. 주어가 없다면 다른 어디라 해도 믿을 정도이다. 신문사는 공장과도 같아 '비능률'을 허용치 않은 탓, 혹은 '작가' 간의 헤게모니 다툼에서 패배한 탓이라고 봐야 할까?
조건영 건축가는 한겨레 사옥의 주된 소재를 ‘이웃
달동네가 애용하는 시멘트, 슬레이트 지붕에 칠하는 페인트 등 가장 값싼 재료’라고 밝혔다. 값싼 재료와 값싼 공법, 정교하지 않은 디테일, 낯선 색조,
매끈하지 않은 형태감 등이 우리의 지난 역사와 앞으로 가질 공화국에서 ‘진짜 인간이라면
어쩔 수 없이 겪게 될 반역의 상징’이라는 것이다. 이어서
‘반역은 위험하고 힘들다. 상투는 안전하고 쉽다. 그러나 모든 진보는 반역으로부터 비롯된다. 반역은 역사와 사회를
썩지 않게 하는 유일한 처방’이며, 바로 그 처방이 한겨레
신문의 탄생설화라고 명시했다.
아마도 그것은 지난 현대사에서 시민들이 감내한 아픔과 민주화를 향한 여망을 잊지 말고 간직하는 한편, 앞으로 나타날지도 모를 반민주화 세력에 맞설 연대의 밀알이 되길 바라는 기대와 희망이 아닐까. 어쩌면 한겨레는 건축가의 의도를 오독한 모양이다. 모름지기 '반역'은 기존의 절대군주로 군림하던 왕을 폐하고 새로운 체제를 정립하고자 할 때 성립하는 것. 이들의 시초가 군부독재 정권 당시 불의에 항거한 '동아투위(동아자유언론수호투쟁위원회)'라고 해도 한겨레는 87년 12월 민주항쟁 이후에나 창립되었다. 그게 30여 년 전의 이야기이다. 군부독재 정권은 노태우 정권을 연장선으로 치더라도 이미 이십 년도 훨씬 전에 종말을 맞이(물론 그 후신은 탄핵을 당하고도 여전히 입법권력으로서 잔존하여 그 위력을 과시하지만)했고, 그땐 시민들이 스스로 일어난 덕에 정작 그 과실만 즐겼다. 뿐만 아니라 노무현 정권 때부터 이들의 논조는 양극단의 평행을 이루는 데 일조했으며, 이명박근혜 정권 9년 간 침묵으로 일관했다. 그랬던 그들이 지금 '반역'을 꿈꾸는 것이다. 그 겨울의 촛불시민이 이룩한 '반역'을 목도하고서도 말이다. 같은 말이지만 둘 사이에는 엄청난 간극이 존재한다. 진보의 출발이자 영원성을 담보한 '반역'이 민주정권을 향해서만 고개를 쳐든다면 어느 누가 그 짜릿한 역모를 위해 투신하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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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 사옥을 방문했을 당시의 전경. 원래 조건영 건축가는 설계 당시부터증축을 계획했고, 우측에 덧댄 듯한 부분이 그것에 해당 |
건축가의 바람대로 한겨레가 '깃발이나 구호와 같이 한겨레 신문사는 공중에 퍼져 사람의 눈과 귀를 자극'시키던 때도 분명 있었다. 하지만 이제는 스스로 천박하고 안일하여 체념에 빠진 불온한 상징이 되어가는 듯하여 안타깝다. 상징의 표현인 건축물에 자신의 치부를 숨기는 것은 꽤나 따분한 서사이며, 오히려 '반역'의 대상인 권력의 속성과 밀접하다. 유형의 상징이 온전하려면 스스로 쇄신해야만 한다. 그렇지 않고서야 머나먼 이국 땅에서 그 형상만 빌려온, 시대의 죄수들을 모아둔 또 다른 감옥과 다를 바 없다. 어차피 그들은 민중의 도움이 없었다면 빛을 보지 못할 이들이었다.
자료사진1,2 - [종이와 콘크리트:한국 현대건축
운동 1987 – 1997 / 2017.9.1 ~ 2018.2.18] 국립현대미술관(서울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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